디테일을 잃지 않고도 빠른 사람을 실제로 본 건 의젓한 여우님이 처음이에요. 보통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되는데요.
온보딩 플로우 개편 때 저와 같이 계셨어요. 7개 스크린을 4개로 줄이는 과감한 안을 제안하시고, 정량 가설과 정성 인터뷰로 근거를 쌓아 오셔서 전원을 설득해내셨습니다. 최종 전환율이 두 자리 수 상승했고요. 신규 결제수단 추가 스프린트 때 외부 PG사와의 스펙 조율을 맡으셨어요.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는 와중에도 매번 재정리해서 공유해주신 덕에 내부 팀이 흔들리지 않고 일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루할 수 있는 협상 과정을 프로로 처리하시던 게 인상에 남아요.
프로젝트 킥오프 전에 이해관계자 모두와 1:1을 돌리셔서, 시작 이후엔 큰 갈등이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각자의 속마음과 우려를 미리 듣고 기록해두신 덕에, 공식 회의에서는 모두가 이미 한 번 말한 내용을 마주하는 셈이었어요. 이 "사전 정렬"이 프로젝트의 절반을 끝낸 거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자기 성과를 드러내는 걸 꺼리시는데, 조직에서는 드러내는 것도 일입니다. 주기적으로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의젓한 여우님이 해놓으신 일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겸손은 미덕이지만, 조직의 자원 배분은 드러난 기여를 중심으로 움직이거든요. 우리 팀 밖 사람들과의 관계 구축에도 시간을 조금 더 쓰시면, 결정권이 팀 밖에 있을 때 훨씬 수월할 거예요. 지금도 팀 안에서는 충분한 신뢰를 쌓으셨지만, 바깥의 의사결정자들에게 의젓한 여우님은 이름만 아는 정도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커피챗 한 번이 나중에 몇 주의 시간을 절약해줄 거예요.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플랫폼 조직에 추천해요. 이해관계자가 많고 시스템이 얽혀 있을수록 진가가 나오는 분입니다. 단순한 제품보다는 여러 팀의 합의와 기술 부채가 얽힌 곳에서 본인의 능력을 전부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시니어가 된 후에 돌아보니 배운 게 더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엔 보이지 않던 의젓한 여우님의 선택들이, 제가 비슷한 자리에 서고 나서야 그 무게가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뒤늦게 감사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조직에서 다시 만났을 때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는 분.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이 꽤 높은데, 그날이 오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고 싶습니다. 의젓한 여우님도 그러시길 바라요.